김환기는 「향(響)」, 「월광」, 「영원의 노래」, 「산월」, 「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호는 수화이다. 일본 니혼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백만회를 조직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김환기는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길진섭(吉鎭燮) 등과 백만회를 조직하는 한편, 자유전의 출품과 아마기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하여 신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6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서구 미술을 3년간 체험하고 귀국하였다.
한편, 1952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파리를 다녀온 후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하여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죽은 뒤에 뉴욕과 서울에서 각각 그를 위한 회고전이 열렸다.
작품 경향은 크게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수업 시대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하여 볼 때,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부터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달과 산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경향이었다.
약 3년간의 파리 시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함축된 이른바 양식의 심화기로 볼 수 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워 버린다든지, 극히 단순한 선으로 요약된 산과 몇 그루의 나목과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 · 「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서울 시대는 파리 시대의 지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성이 보다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곡선의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 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 가운데의 점경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 해석으로 이끌어 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 때까지의 약 10년간의 뉴욕 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도 없어졌다. 그 대신 수묵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다. 그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대 화가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오광수, 열화당, 1979)
『한국현대화가십인(韓國現代畫家十人)』(오광수, 열화당, 1976)
『김환기화집(金煥基畫集)』(국립현대미술관, 1975)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열음사, 1980)
* 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112)